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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26. <부정공>둔암공휘원묘갈명(遯菴公諱洹墓碣銘)
1. 문헌 목록 〉19. 19世 〉28. <부정공>담헌공휘진룡행장(湛軒公諱鎭龍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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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정공>평은공휘진팔가장(坪隱公諱鎭八家狀)
坪隱公諱鎭八家狀 府君諱鎭八初諱鎭奉字武賢號坪隱姓趙氏貫玉川始著於開京中葉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歷三世諱元吉號農隱策勳官大匡玉川府院君諡忠獻麗李五隱之一也享武夷院諱瑜號虔谷官副正麗社旣屋固守罔僕之義獨行通喪之制入杜門洞 贈漢城尹不就遯于順天富有鄕旌孝閭幷褒忠享謙天祠杜門洞院第二子崇文號竹村兵馬節度使 贈兵曹判書諡節愍子諱哲山號龜川童蒙敎官 端廟丙子同死於六臣之禍配食肅慕殿庭子諱瓊號杜門痛家之慘酷終身不仕累傳至夏亨雲山郡守以淸白見稱立石頌德生諱世亮通德郞明於禮學一世推重曰東啓志行克家曰顯相有文行曰基旭隱居行義是高曾祖禰也妣文化柳氏溫良貞淑克配君子 哲宗乙卯正月七日府君岳降之辰也性度寬仁儀容端儼動止言笑不苟不妄不離侍側出外或有異味必袖而歸獻雖蔬果之微不先入口有弟一人友愛尤篤食同案寢同室旣翕且湛和氣藹然時時勸讀曰淸苦資生家道漸索我則專任菽水之供弟則不墜古家之聲是不爲兩專之美耶互相勉勵必期免乎鮮終之歎也山而樵水而漁負米梱織志體之奉定省之節克盡誠孝至於六畜各盡其芻牧之道畜皆肥健常曰牛者食力之家其功最大益加愛而畜之是爲仁愛及物之一道也先考三十八歲晩生不肖鍾愛之而敎有法度或有罪過不厲聲色諄戒飭實有所獲於朱夫子所謂父子之間不欲督責之訓也常謂戒訓曰家貧親老未暇用力於古人之學故痛刻骨髓也百方施敎不肖才鈍質薄辜負丁寧之嚴訓罪皇何極覆載間難容也己巳十月嚴君偶爲欠寧心憂色沮夜不解帶迎醫劑藥不遑暇食夜則祝天願代竟遭大故十一月三十日也擗踊哀號如物欲生不解絰帶不離哀次日省于墓不以風雨寒署或廢府君甫十五歲也執喪如老成人傍人爲之動涕也每値喪餘之日益致誠敬以至省牲滌器烹飪等事莫不躬檢及其將事哀痛如初終時或遇肉食紬衣則必却之曰少傷乎貧不能以是奉吾親也困爲泫然矣服纔闋又遭母夫人喪哀痛一如前喪送終諸節必致無憾也日用事爲不容一毫飾僞持身謹嚴處事正詳奉先殫誠敬敎子篤義方宗族稱其睦鄕黨稱其善敎成於家德加於人吁亦盛矣乎歲乙卯七月偶有不安節禱藥無效竟以七日考終春秋六十一也鄕隣莫不痛惜德厚人死也墓金谷飛可里酉坐原生妣孺人利川徐氏癸亥七月十六日生孝舅姑敬君子夫黨咸稱賢媛也後府君二十八年癸未十一月十六日卒享年八十一墓金谷里案山卯坐原生一男一女男元孝即不肖女南陽房擧石孫福鉉敬鉉鳳鉉洪州宋陽德全州李季順平山申興徹三孫婿也曾孫淵貴淵元淵安福鉉三男淵雲淵珠敬鉉二男淵魯淵珍鳳鉉二男餘幼嗚呼府君孝順雅飭古之君子也孝友勤儉正家之本也溫良慈愛御衆之要也終老於畝畝之中而止不勝痛悶也見今滄桑易處倫綱頹墜窃恐徽蹟之泯沒敢述萬一庶或可免不知不明之罪耶伏惟好懿君子采擇而立言之泣血冀懇之至 男 元孝 謹狀 평은공휘진팔가장(坪隱公諱鎭八家狀) 부군의 휘는 진팔이요, 초휘는 진봉(鎭奉)이며 자는 무현(武賢) 호는 평은이요 성은 조씨로 관향은 옥천이다. 고려 중엽(中葉)에 검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璋)이 시조로 이세를 지나 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인데 공양왕을 책립한 훈공으로 관직이 옥천부원군에 이르렀으니, 시호는 충헌이요, 고려말 五은 중 한 사람이며 무이원(武夷院)에 배향 하였다. 아들 휘 유(瑜)의 호는 건곡이요, 벼슬은 부정인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고 부모 초상에 홀로 三년상을 행하였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한성윤(漢城尹)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순천 부유현(富有縣)에 숨으니 충효로 정포하고 겸천사(謙天祠)와 두문동원(杜門洞院)에 배향하였다. 둘째아들 숭문(崇文)의 호는 죽촌(竹村)이요 병마 절도사로 증 병조 판서며, 시호는 절민(節愍)이요 아들 휘 철산(哲山)의 호는 귀천(龜川)이요 동몽 교관으로 세조(世祖) 병자년에 부자가 함께 四육신의 화변에 참살되어 숙모전정(肅慕殿庭)에 배식되었다. 아들 휘 경(瓊)의 호는 두문인데 집안의 참화를 슬퍼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여러대를 내려와 하형(夏亨)은 운산(雲山) 군수로 청백리의 칭송을 받아 비를 세워 덕을 기리였고, 아들 휘 세량(世亮)은 통덕랑으로 예학에 밝아 온 세상이 추중하였으며, 아들 휘 동계(東啓)는 지행으로 가업을 이었고 아들 휘 현상(顯相)은 문행이 있었으며 아들 휘 기욱(基旭)은 숨어 살며 의리를 행하였으니 이상이 고조·증조·조·고이며, 비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온순 정숙하여 능히 군자를 도왔었다. 철종(哲宗) 을묘(一八五五) 一월 七일에 부군이 출생 하였는데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어질며 거동과 행실이 단정하고 엄전하며, 행동과 언행이 구차하거나 망녕되지 아니하였다.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밖에 나아가 혹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싸가지고 와서 바치고, 비록 하찮은 채소라도 먼저 먹지 아니하였다. 형제 사이에 우애하여 식탁과 침소를 함께 하여 화합하고 또 담락하여 화기가 애애 하였는데 때로는 학문을 권면하면서 말하기를 『청빈한 가세가 점차 어려워 지니 나는 어버이 봉양을 맡고, 아우는 옛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두 가지를 다 갖추게 되니, 아름다운 행사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렇게 서로 힘써 반드시 유종의 미를 거두기로 기약하여 산에 올라 나무하고 물에 나가 고기 잡으며 쌀을 지고 배를 짜서 뜻과 몸을 봉양하고 문안의 절차에 능히 성효를 다하며 여섯가지 가축을 각기 식성에 따라 잘 먹이니 짐승이 다 살찌고 잘 자랐다. 선고께서 三十八세에 불초를 만득하여 사랑하되 법도있게 가르치고, 혹 허물이 있으면 성색을 엄히 하지 아니하고 거듭 거듭 타일러 개과천선 하게 하시어 주자(朱子)가 말한 부자 사이는 독책(督責)하지 않는다 하는 뜻을 지였다. 항상 훈계하시되 나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어 학문을 배울 여가가 없어 후회 막급이다. 하시면서 백방으로 교훈하나 불초가 재질이 노둔하여 정녕한 엄훈을 저버렸으니 그 큰죄는 천지간에 용납하기 어렵도다. 기사년 十월에 부친이 우연히 미령하시니, 근심한 안색으로 띄를 풀지 아니하고 의원을 불러 약을 짓고 밥 먹을 사이없이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十一월 三十일에 大故를 당하여 가슴을 두드리고 뛰며 슬피 부르짖어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처럼 질대를 풀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성묘하며 심한 풍우 한서에도 그만두지 아니하니, 이때는 부군이 十五세였다. 이처럼 집상을 어른처럼 잘하니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탈상 후에는 더욱 정성을 다하여 제수를 살피고 제기를 씻고 제물 삶는 일 등을 몸소 점검하고 향사할 때 애통하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다. 혹 고기와 비단옷을 대하면 반드시 물리치며 말하기를 「젊어서 가난하여 이런 것으로 우리 어버이를 받들지 못하였다.」 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 부인 상사에도 애통함이 정상 때 같았고, 빈장(殯葬) 제절을 유감없이 하였다. 을묘년 七월에 우연히 병을 얻어 백약이 무효하여 마침내 七일에 춘추 六十一세로 별세하니 고을 사람이 후덕 군자가 서거하였다고 애통해 하였다. 묘소는 금곡(金谷) 비가리(飛可里) 유좌(酉坐) 언덕이다. 선비 유인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계해년 七월 十六일에 출생하였는데 출가하여 시부모께 효도하고 군자를 공경하니, 종족이 다 현부인이라 칭도하였다. 부군보다 二十八년 뒤인 계미년 十一월 十六일에 향년 八十一세로 별세하여 묘소는 금곡리(金谷里) 안산 묘좌 언덕이다. 아들 원효(元孝)는 바로 불초 나요, 딸은 남양(南陽) 방 거석(房擧石)에게 출가하고 손자는 복현(福鉉)·경현(敬鉉)·봉현(鳳鉉)·홍주(洪州) 송 양덕(宋陽德) 전주(全州) 이 계순(李季順) 평산 신 흥철(申興徹)의 처이고 증손 연휘(淵貴)·연원(淵元)·연안(淵安)은 복현 소생이요, 연운(淵雲)·연주(淵珠)는 경현 소생이며, 연노(淵魯)·연진(淵珍)은 봉현소생이고, 이하는 기록치 아니한다. 아! 부군은 효순하고 우아 근신한 옛 군자였다. 효우 근검한 것은 집을 바르게 한 근본이요, 온양자애(溫良慈愛)하였는데 마침내 밭두둑 사이에 늙고 말았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상해의 변이 일어나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져 아름다운 사행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감히 만의 하나를 기술하니 혹 알지못하고 밝지 못한 죄를 면할지 모르겠다. 업드려 원하오니 미덕을 좋아한 군자는 가려뽑아 말을 바로 세우기를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바란다. 아들(男) 원효(元孝)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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